
서양 문학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소설을 꼽으라면 절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더하면 20세기 문학의 쌍두 마차로 손색이 없다. 저명한 문예비평가 고 루카치 죄르지라면 토마스 만을 추가해 ‘빅3’를 주장할 법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율리시스》는 웬만하면 들어본 이름이지만, 읽어본 사람은 극소수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유장한 흐름에 맞춰 현대 경영학을 주유하는 이 기획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건 아무래도 대중적으로 유명한 ‘마들렌’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입구가 되는 마들렌. 현대 경영에선 상응하는 개념을 찾으면 ‘브랜드 헤리티지(Brand Heritage)’이지 싶다. 이 용어를 확립한 마츠 우르데, 스티븐 A. 그레이저, 존 M. T. 발머에 기대어 정의하면, 기업의 과거(역사)를 현재의 브랜드 정체성에 투영하여 미래의 경쟁력으로 승화한 전략적 자산이다. 이 애매한 정의를 브랜드 헤리티지의 5가지 특성으로 구체화하면 ▲축적된 이력(Track Record) ▲연속성(continiuty) ▲핵심 가치(Core Values) ▲상징 체계(Symbols) ▲조직 내부의 신념(Organisational Belief)이다.
정의와 특성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기업의 오래된 역사를 나열한 연혁과 브랜드 헤리티지가 궤를 달리하며, 기업의 핵심 가치, 창업주의 신념, 그리고 오랜 세월 고객과 쌓은 신뢰의 총체가 현재의 비즈니스 모델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상태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브랜드 헤리티지는 언제나 중요했지만 지금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 모든 것이 복제 가능한 시대에 접어들면서 오직 '역사와 진정성'만은 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술은 상향 평준화하고 유행은 죽 끓듯 변하지만, ‘좋은’ 기업이 최초에 가졌던 문제의식과 그 해결 과정에서 축적한 고유한 문화는 대체 불가능한 브랜드 정체성을 형성한다. 헤리티지는 기업이 위기에 직면했을 때 올려다봐야 할 북극성이자, 고객에게는 선택의 혼란을 잠재우는 최종적 신뢰 기제이다.

'기원적 결단'
헤리티지는 그 특성상 수십 년의 시간을 쌓아야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다. 하지만 모든 거대한 유산엔 반드시 '기원적 결단(Original Decision)'의 순간이 존재한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위대한 헤리티지는 당연히 시간의 양과 관련하지만, 기원의 그 시점에 내린 결단의 질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기원적 결단이란, 당장의 이익이나 효율성보다 기업이 지켜야 할 궁극의 가치를 우선순위에 두는 최초의 실존적 선택을 의미한다. 이 결단은 기업의 역사 속에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되며, 이후의 모든 의사결정을 규정하는 유전자가 된다. 따라서 지금도 어디선가 장차 위대한 유산이 될 기원적 결단이 내려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파타고니아의 전신인 '쉬나드 이큅먼트(Chouinard Equipment)'를 이끌던 젊은 이본 쉬나드를 떠올려 보자. 1970년대 초 그는 자신이 만든 강철 피톤(암벽 등반용 못)이 바위를 훼손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시 피톤은 그의 회사 매출의 대부분(일반적으로 약 70%로 언급된다)을 차지한 주력 상품이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는 피톤 생산 중단을 결정하고, 바위를 손상하지 않는 알루미늄 너트(Chock)로 전환을 선언했다. 이 선언이 오늘날 기업계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유력 후보 중 하나인 파타고니아가 가진 거대한 헤리티지의 기원적 결단이었다. 헤리티지는 단순히 과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유산이 될 만한 가치를 오늘 심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하는 이는 자신에게 100년의 역사가 없다고 한탄할 게 아니라, 100년 뒤에도 부끄럽지 않을 오늘의 선언을 준비해야 한다.
프루스트 현상
뇌과학 용어 중에 특정 향기(또는 맛)이 과거의 기억을 강렬하게 소환하는 현상을 뜻하는 '프루스트 현상(Proust Phenomenon)’이라는 것이 있다. 후각은 감정과 장기 기억을 담당하는 대뇌변연계와 예외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특정 냄새가 강렬한 기억과 감정을 동시에 환기하는 ‘프루스트 현상’을 낳는다.
선사 시대의 인류에게 특정 냄새와 맛은 독초와 식량을 구분하고, 안전한 안식처를 기억해 내는 생존의 절대적 신호였다. 즉 헤리티지는 심상한 기호가 아니라 인류의 유전자에 각인된 생존을 위한 신뢰 프로토콜이다. 브랜드가 헤리티지를 탑재했다는 말은 고객의 가장 원초적인 뇌 영역에 "우리 기업은, 또는 제품은 검증되었으며 안전하고 믿을 만하다"고 직관적 신호를 보내는 행위로 이해되어야 한다.
수만 년 전 인류가 라스코 동굴 등에 벽화를 그려 자신들의 사냥 모습과 상징을 남긴 것은 예술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부족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생존의 지혜를 세대 간에 전수하기 위한 헤리티지의 기록이었을 것이다. 현대 기업의 로고와 슬로건이 이 동굴 벽화의 변용이라면, 헤리티지는 그 문양 뒤에 숨겨진 부족의 정신, 즉 기업 DNA이다. 뿌리 깊은 헤리티지를 가진 기업은 선사 시대 부족이 거친 자연을 견뎌냈듯, 불확실성의 시장 경제에서 강력한 회복탄력성(Resilience)을 발휘할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소설 속 한 장면-존재의 벼락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어느 겨울날, 화자인 '나'는 어머니가 건네준 홍차에 마들렌 조각을 적셔 입에 넣는다. 그 찰나, 평범한 미각은 육체를 넘어 영혼의 심연을 건드린다. 그것은 기억해 내려는 의지가 만든 인위적인 회상이 아니었다. 마들렌이라는 매개체가 화자의 의식을 무너뜨리고, 잊혔던 콩브레의 나날들을 강제로 소환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과자 부스러기가 섞인 홍차 한 모금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몸을 떨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변화에 주목했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엄습했다.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기쁨은 나를 세상으로부터 고립시켰다(Mais à l’instant même où la gorgée mêlée des miettes du gâteau toucha mon palais, je tressaillis, attentif à ce qui se passait d’extraordinaire en moi. Un plaisir délicieux m’avait envahi, isolé, sans la notion de sa cause.)"
— Marcel Proust,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Tome I, Du côté de chez Swann, Gallimard,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1987, p. 44.
이후 화자는 필사적으로 그 기쁨의 근원을 찾으려 노력하지만, 지성의 힘으로는 번번이 실패한다. 그러다 마침내, 기억은 항복한 화자의 앞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기억이 나타났다. 그 기억은 바로 마들렌 조각의 기억이었다(Le souvenir m’apparut. Ce souvenir était celui du petit morceau de madeleine..."
— Ibid., p. 46.
관리할 수 없는 진실의 도래
프루스트는 두 가지 기억을 구분한다. 자발적 기억(mémoire volontaire)은 지성에 의존한다. 유용하지만 피상적이다. 경영의 언어로 치환하면, 화려하게 정리된 연표, 매끈하게 다듬어진 기업 연혁, 그리고 숫자로 압축된 슬로건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은 죽어서 박제로 남는다. 반대로 고객(혹은 독자)의 영혼을 흔드는 진실은 언제나 의지를 배반하고 찾아오는 비자발적 기억(mémoire involontaire) 속에 숨어 있다.
프루스트는 기억이 "떠올랐다"거나 "생각났다"고 쓰지 않았다. 그는 "나타났다(apparut)"는 동사를 선택했다. 이 단어는 기억을 경영자가 생산해낸 결과물이 아니라, 예기치 않게 도래하는 사건으로 만든다. 통제도, 관리도, 인위적인 재현도 없다. 진정한 헤리티지는 억지로 설계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본질이 사람들 앞에 스스로 출현하는 현상이다. 경영자가 할 일은 기억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나타날 수 있는 홍차와 마들렌의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데이터가 놓치는 '사건'
현대 경영은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한다. 시장 조사와 데이터 분석은 '자발적 기억'의 전형적 사례이다. 그러나 시장과 데이터는 고객의 결핍을 찾아낼 수 있어도, 고객의 전율은 설계할 수 없다.
진정한 브랜드 헤리티지 전략은 기업의 빛나는 과거를 자랑하는 것일 수 없다. 창업주가 가졌던 최초의 절박함, 혹은 제품이 고객의 삶에 처음으로 '나타난(apparut)' 그 찰나의 마법 같은 순간을 복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관리의 영역이 아니라 발견의 영역이다.
유명한 ‘펩시 챌린지’(2004년)는 브랜드 연상이 인간의 판단을 어떻게 전환하는지를 신경과학적으로 입증했다. 블라인드 테스트에서는 다수의 참가자가 펩시의 맛을 선호했지만, 브랜드를 공개하자 달라졌다. 뇌의 활성화가 감각 보상 영역(맛)에서 기억·정체성·가치 판단을 담당하는 영역으로 이동했고, 그 결과 코카콜라 선택이 유의미하게 증가했다. 코카콜라가 음료의 하나가 아니라, 산타클로스와 가족의 식사, 승리의 상징 같은 관계의 총체적 기억을 축적한 문화적 기호였기 때문이다. 단기적인 기능(맛)은 장기적인 관계의 기억(헤리티지)을 이길 수 없었다.

파타고니아는 2011년 11월 25일(블랙프라이데이) 미국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에 전면으로 "Don’t Buy This Jacket"이라는 광고를 게재했다. 유명한 마케팅 사례로 두고두고 회자하지만 이것을 마케팅의 역설로만 보는 것 좁은 식견이다. 창업자 이본 쉬나드가 바위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수익성 높은 피톤 생산을 중단한 1970년대의 그 마들렌의 순간을 소환한 프루스트적 행위였다. 파타고니아는 숫자를 쫓는 대신 자사의 친환경 DNA가 스스로 나타나게(apparut) 하였고, 고객들은 그 진정성에 열광하며 강력한 고객층을 형성했다.
관계의 총체성
경영은 숫자가 아니라 관계의 총체성이다. 프루스트를 차용하면 헤리티지는 기업만의 소유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기업은 헤리티지를 시간과, 이해관계자와 총체적으로 공유한다. 연표라는 직선적 시간을 넘어, 과거와 현재가 겹쳐지는 입체적 시간을 회복하고 기업의 기억이 고객의 개인적 기억과 만나 '나타나는' 공명(Resonance)을 일으키는 게 경영의 본질이다.
최고경영자가 헤리티지를 발굴하는 것은 골동품을 닦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기억이 스스로 출현하도록 통로를 여는 행위이다.

[안치용의 Critique: '나타남'을 허하라]
오늘날 경영자들은 기억을 제조하려 한다. 화려한 브랜딩과 효과적 광고로 고객의 머릿속에 기억을 주입하려 든다. 프루스트는 지성으로 조작된 기억은 생명력이 없다고 일갈한다.
이제 조직의 깊숙한 곳을 들여다봐야 한다. 유행을 쫓기 위해 억지로 짜낸 슬로건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가슴 속에 불현듯 '나타나는(apparut)' 자부심이 있는지를. 창업 당시의 절박했던 문제의식, 첫 고객을 만났을 때의 설렘이 바로 기업과 구성원의 마들렌이다. 진정한 본질은 관리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발견될 뿐이다.
지금 당신에게, 당신의 조직에 스스로 나타나길 기다리는 시간의 기억은 무엇입니까?
(이 글은 뉴스토마토에도 실립니다.)
아주대학교 융합ESG학과 특임교수이자 ESG비즈니스리뷰 발행인, ESG연구소장입니다. 인사조직 및 CSR을 전공한 경영학 박사로서 국무총리실 시민사회발전위원회 위원(차관급)을 역임하며 공공 거버넌스 정책 수립에 참여하였습니다. 경향신문에 기자로 22년 재직했으며 그중 10년가량을 사회책임 전문기자로 글로벌 ESG 트렌드를 심층 취재했습니다. 카이스트(KAIST) 대우교수, 경희대 경영대학 및 한국외대 경영대학원 겸임교수 등으로 후학을 양성하며 학술적 전문성을 쌓았습니다.
현재 국가기술표준원 ESG전문위원회 위원, ISO 53001 심사원(보) 등으로 활동하며 국제 표준에 기반한 실무 지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론과 정책, 실무를 융합한 독보적인 분석으로 한국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제고하고 우리 기업의 지속가능경영을 확산하는 데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 ESG와 인문학 등의 주제에 관한 40여권의 저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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